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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

기사승인 2019.11.29  15: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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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구하라가 세상을 떠났다. 한해 2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는 나라,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죽음이 무수히 넘쳐나는 나라에서 이 죽음이 큰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세간에서는 가수 겸 배우 설리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전염효과를 미칠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으로 고양된 청년층 사이에서 이들의 죽음은 작은 사건이 아니라 손댈 수 없이 썩어버린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대 사안이자 징후이다.

▲ 여성·노동·시민단체가 지난 7월 26일 김학의 윤중천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성폭력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회, 여성에 대한 폭력이 ‘향응’이 되는 사회 문화를 꼬집고 있다.

최근 내려진 성폭력 관련 사법조치 가운데 몇가지만 복기해봐도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불행 탓이 아니다. 구하라씨는 본인의 동의 없이 촬영된 동영상으로 협박받았고 무단으로 침입한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했지만, 법원은 “구씨가 먼저 호감을 표시했고 두 사람이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던 사이”라는 이유로 가해자 최씨에게 불법촬영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구씨의 죽음 이후 같은 판사가 서울 시내 웨딩홀에서 여성 하객들의 치마 속을 수십차례 촬영한 사진기사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범죄 양형기준을 정비하라는 청와대 청원이 이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단순히 양형기준이 미비해서 생긴 일이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둔감한 사법부의 문제이자, 불법촬영된 성관계 동영상을 대량으로 소비하면서 규제할 생각이 없는 한국사회의 문제로 보는 편이 옳다.

몇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사법부는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촬영된 성관계 동영상 속 인물이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맞는다면서도 성접대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무죄를 판결했다. 검찰의 고의적인 수사 지연에 따른 일이지만 판결 자체에도 문제는 많았다.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전 대표도 성매매 알선 등에 대해 ‘객관적 증거’가 없다면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른바 ‘레깅스 판결’에서는 판사가 기소장에도 쓸 수 없는 불법촬영 사진을 판결문에 첨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동영상 사이트의 운영자를 붙잡았더니 한국인이었는데, 한국법원은 이 사람에게 징역 1년 6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분을 내렸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영상을 소지만 해도 일이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중죄다. 이 모든 일들이 길어야 석달 안에, 대부분 이달 들어 일어났다.

미투 이후 한국사회에도 어느 정도 의미있는 변화가 생겨났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이 가해자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분노하고 좌절했다. 특권층일수록 여성의 몸을 노골적으로 거래하고 도구로 사용하지만 법은 그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그들은 온갖 방식으로 처벌을 피해간다.

‘검찰개혁’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공수처만 생기면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검찰이 기껏 기소해도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는 모습 앞에서 그러한 낙관에 동의하기란 어렵다. 안희정 사건의 2심에서는 1심과 달리 성인지감수성에 입각하여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판결이 나왔다고들 하지만, 피해자가 경험하는 사회는 여전히 냉혹하다. 특히 피해자가 연예인이라도 될라치면 몸과 마음에 대한 권리를 모두 돈으로 산 듯이 구는 반응이 쏟아져 나오곤 하니, 폭력적인 성문화에 한국사회 전체가 가담하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미투운동 이후에 한국사회가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의 상식이 많은 부분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사법부, 언론, 시장은 변화가 너무나 느리거나 간혹은 퇴행하기 때문에 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면도 있다. 도대체 이 사회가 내리는 법적 판단과 권력 행사에 나의 목소리, 피해자의 자리는 있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구하라씨가 사망한 후에 성관계 동영상이 실시간 연관검색어에 올랐고, 폭행피해 당시의 신체를 촬영한 사진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다시 퍼졌으며, 이는 여러 사람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시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판결 당시 판사도 피해자를 앞에 앉혀둔 채 성관계 동영상을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언론은 악성 댓글이 재능있는 한류 스타의 때 이른 죽음을 불러왔다며 댓글 문화를 비판했지만, 개인의 SNS에 올라온 내용을 일일이 기사화해 악성 댓글을 유도한 언론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같은 매체의 다른 지면에서 여전히 비슷한 류의 연예인 사생활 기사를 발행했다. 이미 위헌판결이 난 인터넷 실명제를 다시 도입해서 익명의 댓글을 막아야 한다는 실효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실명으로도 악성 댓글을 다는 시대가 되었다. 혐오발언과 악성 댓글이 오롯이 익명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는 여성 연예인이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혹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한다.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성소수자라는 이유 그 자체로도 인간됨을 박탈당하는 수준의 혐오발언이 가해지는 중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일단 인권을 포괄적으로 보호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절실한데, 이를 주장할라치면 이른바 ‘사회적 합의’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실제로 구하라씨의 ‘리벤지포르노’ 피해는 작년 10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혜화역 시위에서 여성차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의미화되기도 했다. 당시에도 차별금지법 요구는 보수교회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정부는 법 제정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하는 차별금지 대상에 성적 지향이 들어간 것은 사회적 합의 없이 일어난 일이라며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발의된 상태이다. 반면, 노골적인 혐오와 비하, 차별 행위를 막고 인권을 보호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대통령 공약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가 부재하다는 이유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이어지다보니 이제 심지어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어차피 법을 만들어도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기도 한다.

모든 입법이나 규제가 완전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만 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의 반대가 있으면 인권마저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실제로는 노골적인 차별이나 다름없다.

지난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나온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말이 사용되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맥락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용어는 차별과 혐오를 행하는 사람들이 역차별이나 종교적인 신념을 내세울 때 사용될 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담겨 있지 않다. 성폭력의 문제에서 종종 시민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법판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언론이 혐오의 언어와 선정적인 보도, 심지어 가짜뉴스의 선동으로 차별에 앞장설 때 정부는 과연 어떤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고 있는가. 정부의 역할 없이 혐오가 저절로 사라지는 날,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정치’ 문제는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해결해도 성이나 차별 문제는 합의를 기다려야 하는 사항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량한 차별’도 아니고 그저 직접적인 차별이다.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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