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좌파가 나라를 망쳐 먹었나?

기사승인 2017.05.04  08:44:42

공유
default_news_ad1

모임에서 가끔씩 뵙는 선배님이 한 분 계신다. 연세가 70대 중반이지만 타고 난 체질 덕인지 자기 수련 덕인지 뒷모습을 보면 5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걸음이 날렵하고 체격이 당당하다. 무술 합이 12단인 그 분은 요즘도 매일 5킬로미터를 달리고 턱걸이를 30개씩 한다고 자랑하신다.

젊어서 청와대 경호실 간부로 일했던 그 선배는 가끔 자신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근무했더라면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슴을 두들긴다. 나는 정말 그 선배님이 그 때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면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열 명이 덤볐다 하더라도 과녁을 맞출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빨갱이들 다 때려죽여야 하는데...”

그 선배님 연세가 70을 넘어가면서 전에 하지 않았던 말씀을 자주 하기 시작하셨다. “우리나라엔 빨갱이가 너무 많아. 참 큰 걱정이야. 이 빨갱이 새X들 다 때려 죽여야 하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내가 맨 넥타이가 빨간 색은 아닌지 왼쪽으로 틀어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곤 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건 없건 선배님이 수시로 “....빨갱이들 다 때려죽여야 하는데...”라며 우국충정을 토로하면 나는 그 때마다 “네....때려....죽여야죠”하며 맞장구쳐야 하는데 그게 부담스러워 요즘엔 둘이서 만나는 자리는 피하고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서 그 선배님을 볼 수 있었다. 시청 앞 광장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물결치는 가운데 “00고등학교 총동문 구국동지회”라는 커다란 플래카드 옆에서 주먹 불끈 쥐고 핏대 올려 구호 외치는 그 모습을....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자유한국당의 홍준표후보가 맹렬하게 기세를 확장하고 있다.

한국당은 박근혜정부를 탄생시켰던 새누리당의 재탕이기에 이번 대선에선 한국당 후보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홍준표후보의 구호를 들으니 귀에 익숙하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 온다 - “좌파가 집권하면 나라 망쳐 먹는다. 보수 후보를 대통령 만들어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

자유한국당과 홍준표후보의 ‘좌파 척결’이 일부 유권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는 이유는 좌파 즉 “빨갱이들은 모두 때려죽여야 한다”는 명제에 대한 공감대가 우리 국민에게 널리 형성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돌이켜 보건대 내 머릿속에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좌익=좌파=반정부=공산당=빨갱이’라는 등식이 새겨져 있다. 더구나 내가 대학생일 때 학장과 학문적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말문이 막혀 열이 받친 학장이 “이 빨갱이 새X, 왜 이리 말이 많아?”라며 내 엉덩이를 걷어찬 일이 있어 ‘빨갱이=응징 대상’이라는 개념이 내 지식체계에 각별하게 각인돼 있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좌파·종북’ 프레임에 갇힌 대선

그런데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정말 좌파가 나라를 망쳐 먹었나? 지금까지 11명의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쳐 갔지만 홍준표후보가 좌파라고 지칭하는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이다. 이 분들이 나라를 망쳤다고?

김대중대통령은 보수 우파의 상징 김영삼대통령이 불러들인 미증유의 외환위기로 거덜난 경제를 되살렸고 IT강국의 기초를 닦은 분이다. 나라를 망쳐먹은 건 우파 대통령이 아닌가?

노무현대통령 역시 국제관계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반도 긴장완화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노무현대통령 시절에 국난이나 내우외환이 있었던가?

우파 대통령은 어떠했나? 이승만대통령은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다가 4.19혁명으로 망명했지. 박정희대통령은 영구집권을 꿈꾸다가 부하가 쏜 총에 목숨을 잃었고. 전두환대통령은 집권을 위해 얼마나 많은 민주시민의 피를 강요했나? 노태우대통령의 부정부패는 또 어떻고? 김영삼대통령의 실정으로 경제적 고통을 받은 국민은 그 얼마인가? 이명박대통령의 4대강 삽질이 남긴 환경재앙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고. 박근혜대통령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나라 말아먹은 건 우파대통령

이같이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종북, 망국’이요 ‘보수는 애국, 안보’라는 고정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오늘도 한국자유당에서는 1번과 3번 후보 옆에 인민공화국기를 그려 넣고 2번 후보 옆에는 태극기를 그려 넣은 모의 투표용지를 보여 주면서 이번 대선이 ‘종북 좌빨’과 ‘애국 보수’의 대결임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홍준표후보와 그의 참모들이 빨간색 옷차림으로 ‘빨갱이 타도’를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구국동지회 선배님의 연세와 홍준표후보의 나이를 자꾸 따져보게 된다.

▲ 조기양 언론인

 

 

 

 

 

조기양 언론인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setImage2

최신기사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