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가수 송가인과 ‘풀잎이슬’ 인간

기사승인 2019.09.02  08:10:11

공유
default_news_ad1

-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동아지중해 ‘死者의 書’

치명적이었다. TV가 들려주는 노래의 애절함이 마음 찔렀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들을 적마다 그 매듭 새롭게 감기는 설움, 너무 익숙해 웬만해선 누구도 이 곡조로 가슴 흔들지 못하리라. 그런데, 내 마음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누구지?

▲ 망자혼사굿을 벌이는 송순단 만신 (이윤선 著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진도 상장례와 재생의례’ 사진)

송가인, 방송사 노래겨루기 프로그램에서 벼락스타가 됐다고 했다. 진도 출신이라 해서, 그 동네야 천성(天性)이 그러니... 하고 고개 끄덕였더니 엄마가 무속인이란다. 번뜻 그 책 생각이 났다. 진도 당골 송순단 만신의 사진이 여러 장 나온 책이었다. 직감대로였다.

이승과 저승 갈마들며 신(神)들을 어르고 졸라 사연 많은 (죽음의) 슬픔들을 치유하는 샤먼(shaman)은 인류 거의 모든 겨레의 마음의 바탕이다. 우리에겐 무당이다. 뭇 종교의 출발점이다. 그 겨레들 마음의 뿌리이고 골격이기도 할 터. 문명을 지어온 중요한 재료다.

샤먼의 일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를 주재(主宰)하는 것이다. 진도 출신 이윤선 남도민속학회 회장이 지은 그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진도 상장례(喪葬禮)와 재생 의례’라는 부제가 붙었다. 초상집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얘기다.

풀잎이슬, 초로(草露)에 불과하나 인간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도 장엄하다. 그 뜻 기리는 마음과 형식은 장중하다. 남도의 초분(草墳)이나 독수리에게 주검을 드리는 티베트의 천장(天葬)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만큼 무겁다. 오래된 문구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의 속뜻이겠다.

이 대목에서 비로소 인간의 뜻 피어난다. 모르는 채로 아름답기도 하리라. 이념은 차라리 깃털일 터, 이 영원한 주제는 피해선 안 된다. 피할 수도 없다. 미아리 고개의 그 한(恨)이 부르는 우리 설움의 본디를 그 노래는 꿰고 있었다. 누가 저리 처절하게 독할까? 송가인이었다.

청춘 남녀 넋을 건져 맺어주는 ‘혼 건짐과 죽은 자들의 결혼’ 항목을 읽으며 애써 울음 삼켰다. 세월호와 5·18, 멀리는 명량대첩 동학혁명 삼별초의 혼이 우우우 휘돌며 고함치는 씻김굿의 여울이었다. 그 울돌목, 무당이 하얀 지전(紙錢) 뭉치 흔들어 혼을 불렀다. 송순단이었다.

이승에 잔뜩 삐쳐 저승길로 못 들어서고 물속 헤매던 혼들에게 생사의 뜻 깨우쳐 달래는 샤먼의 절절한 맘씨와 말씨는 얼마나 그윽한가. 바다의 신 용왕께도 비손으로 도움 청하니 마침내 신대 삼은 대나무 가지 크게 흔들렸다. 송가인의 노래가 품은 절절함이 또한 그랬다.

여린 인생들을, 산 자 죽은 자 할 것 없이 보듬고 상처 아물게 하는 이 귀한 과정은 인류의 오랜 축제다. ‘우리의 축제’ 또한 이집트 신화나 티베트 불교의 ‘사자(死者)의 서(書)’처럼 웅혼(雄渾)하고 아름답다.

이 진도 판(版) ‘사자의 서’는 나아가 우리 겨레의 삶과 죽음에 관한 마음과 의례(儀禮)의 틀을 압축적으로 담았다고도 보겠다. 씻김굿 다시래기 윷놀이 만가(輓歌) 초분 등 일련의 ‘죽음축제’에서 그 대동(大同)과 소이(小異)를 가려 보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아는 공부일 터다.

빨간 진도술 홍주의 ‘발효(醱酵)’가 사람 사는 어떤 뜻을 함께 담는지, 진도북춤이 들려주는 고무(鼓舞·힘내라고 격려함)의 응원도 함께 짐작할 수 있겠다. ‘힐링’을 넘어 재생(再生)의 염원이 진도문화의 핵심임을 다시 본다. 재생은 내일의 약속이다.

송가인의 심상찮은 이 기운, 방탄소년단의 기세와 함께 21세기 한국이 코카콜라에 휩쓸려 물질문명을 표류하는 현대의 인류에게 던지는 개벽(開闢)의 핵폭탄은 아닐지. 그 ‘사자의 서’에서 지은이는 거듭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 송가인이 ‘2019 국제농업박람회’(나주 전남농업기술원 일원, 10월 17~27일)의 홍보대사로 나서 개막공연 등으로 흥을 돋운다.

토/막/새/김

시(示)는 제사 지내는 단(壇)의 갑골문

“축제한다면서 왜 제사는 지내요?” 한 행사 진행자의 볼멘소리다. 잔치 이벤트를 하자면서 고사(告祀) 지내고, 솔가지에 색종이 띠 두르고, 뜬금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다.

축제(祝祭), 페스티벌이나 카니발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리라.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하는 뜻 모를 ‘주문’이 뭔 소용이며, 돼지머리에 절하고 돈 내는 것은 또 뭔가? 어리석은(迷) 믿음(信) ‘미신’이란다. 지난해의 현장 목격담이다.

페스티벌, 카니발의 시작은 종교다. 인류학,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이벤트가 오늘날 종교 현장을 넘어 여러 의도로 각색되고 변질된 것이다. 인류의 그 축제는 바로 제사(祭祀)였구나, 너와 나, 모두의 행복을 비는 기도가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은 미신인가?

축제 제사 고사의 한자 축(祝) 제(祭) 사(祀)에 모두 들어있는 그림(글자) 시(示)는 제사 지내는 단(壇)의 갑골문이다. 제단 위에 고기(肉 ⺼, 육)를 손(又, 우)으로 얹어 (신에게) 보여주는 것이 祭다. 祝은 示에 입이 큰 사람, 祀는 어린 사람의 그림이 붙어 나름의 뜻을 이뤘다.

우리의 ‘축제’는 서양의 각색된 페스티벌, 카니발의 번역어다. 화려한 모양과 (관광) 효과를 기대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스러진다. 그래서 축제 본래의 의의는 왕따 상태다. ‘파티하자며 웬 제사?’ 소리 나오는 까닭이리라. 속뜻 알고, 제대로 기도해야 축제는 성공한다.

강상헌 기자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setImage2

최신기사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