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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전투와 ‘영세중립’ 한국

기사승인 2019.05.16  09: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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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헌의 한자, 인간의 맛–‘은근과 끈기’는 어쩌다 ‘오기와 끈기’가 됐을까?

국문학자 조윤제(1904∼1976)는 우리 겨레의 특징적인 성품으로 ‘은근과 끈기’를 들었다. ‘은근은 한국의 미(美)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라는 대목이다.

수학자이며 문명학자인 김용운 박사(한양대 명예교수·한국수학문화연구소장)의 저서 <역사의 역습>에는 ‘오기와 끈기’라는 말이 나온다. 그 표현에 빗댄 말이다. 은근이 오기(傲氣)가 됐다면, 우리의 아름다움이 어떤 이유에서건 상처를 받은 것이다. 김용운 교수의 걱정 어린 진단과 처방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사기(士氣) 떨어지면 오기로 한다’는 시쳇말처럼, 오기는 열등함을 억지로 만회하기 위한 안간힘이다. 힘 넉넉하면 오기부릴 일 없다. 한중일(韓中日) 3국의 관계사(關係史)에서 이 ‘오기’는 때로 볼썽사나운 이빨을 드러낸다.

▲ 수학과 동아시아문명사의 거목 김용운 교수. ‘우리의 미래는 영세중립국’이라고 설파한다. (사진=미디어오늘 이치열 기자)

원형사관(原型史觀)이라는 자신의 잣대로 동아시아 3국의 ‘작동원리’를 고찰해온 김용운 교수는 이런 오기의 연원(淵源) 중 하나로 ‘백강전투’가 제대로 해석되지 못했던 점을 든다. 그의 ‘원형’의 뜻은 겨레의 핵심(ethnic core 에스닉 코어)이다. 우리의 줏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가 기록한 ‘백강전투’와 우리의 역사를 비교해 과거를 풀었다. 이후 백제 땅은 ‘신라의 점령지’였다. ‘신라 땅’으로 여겨지지 않은 차별의 대상이었다. ‘가짜’ 논란도 많은 고려의 ‘훈요십조’가 백제 땅 사람들을 경계하는 뜻을 담은 것과도 무관치 않겠다.

백강전투 무렵에만 3만2000명으로 추정되는 (엘리트)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했을 것으로 본다. 일본 천황이 ‘스스로의 가계(家系)가 백제와 관련이 깊다’고 말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일본 안의 한국’이 가지는 의미는 역사를 바로 살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중국과의 일인 사대주의와 동방예의지국의 본질도, 마찬가지로 백강전투의 결과물로 읽힌다.

흐르고 구르는 것이 역사다. 동아지중해의 핵심인 한반도가 다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여러 호랑이들이 눈을 부라리고 째려보는, 호시탐탐(虎視眈眈)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초 서구와 일본 등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던 토끼의 모습 한반도를 보는 듯하다.

그 토끼 중 하나가 온몸에 독을 바르고 ‘너 죽고 나 죽자’의 이미지로 세상을 흔들었다. 김 교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미국과 맞짱 뜨는 독설(毒舌)을 ‘역사의 역습’이라고 해석한다.

논리 대신 사대주의나 반(反)사대주의, 특히 일본에 대해 혐오 일변도인 대중의 정서 등으로 이 문제는 풀 수 없다는 것이 노학자의 충언이다. 백강전투의 뜻을 다시 명상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하지 않고 동맹도 맺지 않는, 영세중립국(永世中立國)이 지금 그의 뜻이다.

김 교수는 “우리는 오기부릴 이유가 없는, 낙낙한 겨레다. 다만 백강전투의 뜻을 제대로 매기지 않은 대가를 치르느라 내내 이웃(나라)에 못난 행세를 해왔던 것 아닌가 새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한반도의 열강에 대한 한이나 전라도 민중의 한을 새로운 틀로 해석해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오기’를 다시 ‘은근’으로 바꾸는 일이겠다.

‘영세중립’은 큰 주제, 어려운 일이다. 옛적 대한제국도 하려다 힘이 부쳐 못 했다. 책 <역사의 역습>에도 담긴 평생의 이 결론을 그는 젊은이들에게 몸소 들려주고자 한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애국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1807년)을 연상하게도 한다.

1927년생, 학문 큰 노장(老長)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인 노자와 장자, 노장(老莊)이 느껴진다. 구조주의 수학으로 복잡계(複雜界)를 풀어헤치는 구수한 입담과 논리는 오히려 젊다. ‘학자가 왜 필요한가?’하는 우문(愚問)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다. 자발없고 무식한 시대를 매섭게 꾸중하는 회초리로 여겨야할 말씀으로도 들릴 터다.

토막새김

백강전투?

백강전투가 뭐지? 663년 백제부흥세력이 왜(倭)의 3만 명이 넘는 대군과 함께 신라 당나라 연합군과 백강 하류에서 싸움을 벌인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한반도에서 벌어진 한중일 3국의 대형 국제 전쟁인 백강전투다. 백강(白江)은 전북 정읍과 김제를 지나 부안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동진강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는 이후 3국의 집단무의식에 큰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이 대목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백강전투 이후 우리 영토의 경계가 한반도의 허리(평양-원산)로 설정된다. 한국의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백성 즉 국민 아닌, 중국의 신임(信任) 여부가 나라 즉 왕조 정통성의 바탕이 되는 못생긴 정치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이 남쪽 오랑캐 장수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잡아들였다는 이 말은 베트남의 대(對) 중국 항쟁을 증언하는 역사다. 백강전투 이후 우리에게 이런 역사는 없다. ‘순한 양’으로 살았기에 중국은 우리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렀고 우리는 속없이 이를 기꺼워했다. 중국과 우리는 부자(父子)나 군신(君臣)의 관계였던 것이다.

구다라(큰 나라라는 뜻) 또는 본국(本國)이라고 백제를 섬기던 왜가 이 전투에서 실망한 나머지 ‘별 것 아니네’ 하는 심뽀로 백제 땅 한반도를 시답잖게 여기거나, 혐오하게 된 것은 한일 사이의 큰 변화다. 당시 백강에 출병한 왜의 장수는 훗날의 일본 천황 덴지(天智 천지)였다.​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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