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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昔)과 덕(德)

기사승인 2020.08.20  15: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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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냅둬라, 저 강 마냥 흐르게 하리니...

‘나비의 꿈’으로 회자(膾炙)되는 중국의 도사 장자(莊子)가 새 밀레니엄의 설렘 식어갈 무렵 한국의 정책을 자문하고자 내한했다. 홍수 막고 유람선 띄울 운하를 만든다며 강을 파서 반듯하게 펴고 댐과 보(洑)를 짓는다는, 4대강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깃발을 든 그의 결론은 ‘냅둬라.’였다. 최소한 수십만 년 흐르고 흘러 저 모양을 이룬 강에 포클레인 삽질을 하는 순간 우주의 섭리는 인간을 내칠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저 강, 마냥 흐르게 하라... 물론 가정이다. 인간은, 기껏 백년 산다.

▲ 섬진강에 홍수 났다. 기상이변이 이제 더 큰 재앙으로 다가설 것이라 한다. 애써 모르는 채 해봐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KBS 뉴스 화면)

현실에서, 운하는 피했으나 삽질은 무자비했다. 백년에 한번 올 정도의 비와 홍수를 대비해 짓는다는 둑과 보가 하릴없이 넘치거나 터졌다. 어리석은 이들 속에서는 ‘섬진강도 4대강 했으면 순창 곡성 구례 하동 등지의 피해를 면했을 것’이라는 억지소리도 나온다. 치매려니.

어느 문명이나 성경의 ‘노아의 방주’같은 홍수신화나 설화가 있다. 요순시대 중국 요와 순 다음, 우 임금은 홍수를 다스린 영웅이다. 대홍수 속에서 세상의 씨앗 지킨 노아도 대단하다. 또 아시아 신화에서 치수(治水)는 천하를 얻는 제1의 조건이었다.

얼마나 비가 많이 왔으면 인류의 심성에 저리 큰 흔적으로 남았을까? 노아의 홍수는 40일, 이번 장맛비는 두 달에 가까웠다. 어르신들도 “해도 해도 이런 비는 처음일세...” 입 모았다.

기후변화, ‘위기’로 둔갑한 저 ‘변화’가 우리를 채찍질하고 그 생채기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경험은 참혹했다. 바다가 돼버린 영산강변 나주벌, 놀랍고 슬펐다. 전설 속 홍수도 저랬을까?

‘접때 비가 많이 왔다.’는 기억을 갑골문(甲骨文)으로 새긴 그림이 옛 석(昔)자의 첫 글자다. 저 해(日 일)까지 덮을 듯 홍수는 거침없이 넘실댔다. 昔자가 ‘접때’의 뜻이 된 실마리다.

한자는, 시(詩)처럼 비유의 실마리(힌트)가 뜻을 빚는 정서적 화학이다. 섭섭하다는 석(惜)자는 그 때(昔) 서럽고 무섭던 마음(忄, 心 심)을 합친 것이다. 석별 아닌 이별이 어디 있으랴.

昔을 惜함, 즉 접때를 추억하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하다. 강은, 홍수에도 자못 유장(悠長)한 낙낙한 여유를 가진다. 강의 덕(德)을 말하는 것이다.

비 퍼부어도, 상류 큰 댐을 다 비워내도 둑을 넘지 않도록 강은 물이 늘 흐르는 공간보다 훨씬 너른 강폭(江幅)을 가진다. 평소에는 그 너비가 쓸데없는 공간으로 보이기도 하더라. ‘4대강 사업’이 째려보고 손을 대기도 했다. 홍수 때 보니, 그 공간이 세상을 살리지 않더냐.

강의 이런 덕성은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는 인생들 마음 크기를 짚어보게 한다. 그 여유는 선과 악, 성(聖)과 속(俗), 위와 아래 등은 물론 너와 나, 과거와 미래도 넘어서는 뜻일 터다.

‘세상의 절대 가치’라는 도(道)를 구현하는 도구인 덕(德)은, 노자의 도덕경보다도, 공활(空豁)하고도 호한(豪澣)하다. 우주만큼, 영원처럼 큰 그 것(곳)을 우리 청춘들은 마땅히 가져야 한다. 그건 스마트폰 검색(檢索)에 없다. ‘나’를 찾는 사색(思索)에 있다.

▲ ‘옛날(접때) 비가 많이 왔다’는 3,500여 년 전 황하문명 사람들의 이 그림은 ‘옛날’을 뜻하는 석(昔)이 됐다. (이악의 著 ‘한자정해’)

토/막/새/김

접때(昔) 잊으니 춤추는 건 ‘부덕의 소치’

도덕(道德)이 영어 모럴즈(morals)의 짝이 된 건 자연(自然)이 네이처(nature)의 짝 된 것과 흡사하다. 17세기쯤부터 종교와 대포를 함께 싣고 침략해 온 서양의 배에서 삐져나온 인문학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도덕도, 자연도 그 뜻이 아니었다.

그 번역은 섬나라 개화기 왜(倭)가 맡았고 번역된 그 서양 이미지를 자기 모습 삼아, 결국은 핵(核)의 천벌을 받지만, 일본은 일세를 풍미(風靡)했다. (세상이) 저절로(自) 그러하다(然)는 원래 뜻 말고, ‘자연보호’의 자연으로 ‘자연’을 더 잘 아는 내역이다. ‘도덕’도 비슷하다.

우리의 ‘가치’는 잠자고, 뭐든 돈으로 바꿔내는 외래 기술이 세상 휘감다보니 이제는 덕(德)이 불편한가. 되도록 천박하게, 더 염장 지르는 말과 뜻을 궁리하고 공석에서까지 더러운 싸움에 골몰하는 ‘공적 인물’들도 보인다. 접때(昔)를 잊으니 춤추는 건 ‘부덕의 소치’들이다.

심지어 저 도적들은 ‘나’를, 민주 시민들을 제 핑계 삼더라. 홍수나 벼락은 뭐 하러 있지?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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