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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德)의 본디-대동소이

기사승인 2019.11.02  16: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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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德)의 완성…‘더 큰 미래 지닌 세대’ 섬기고 배우자

대동소이,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혹은 도긴개긴이라고?

‘큰 차이[異] 없이 거의 같다[同]’는 건 사전의 풀이다. 도가(道家) 사상가 장자(莊子)가 2,300년쯤 전에 들어 보인 대동소이(大同小異)는 이 ‘대동소이’와 생판 다르다.

2003년생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호된 꾸중에 세상이 놀란다. ‘더 큰 미래를 지닌 세대’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W. 워즈워드 시(詩)의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잊고 있었다. 다시 보면, 불 보듯 또렷하다. 사람들아,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 소녀 툰베리의 분노에 인류의 미래가 걸렸다. 우리는 그 뜻이나마 알고 있는가? (KBS 뉴스)

‘헛짓’ 하느라 인류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고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는, 그리하여 우리 터전의 기후(氣候)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정치가를 포함한) 성인(成人)들은 인류의 ‘주인’이 아니다.

소녀는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당신들은 공허한 말로 내 꿈과 어린 시절을 훔쳤다.’며 직격탄을 퍼부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망치지 말라, 다음 세대 주머니의 돈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의 당신들처럼, 우리도 미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죽어가요.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어요. 대규모 멸종이 시작됐는데 여러분은 돈과 지속적 경제성장이라는 동화책 얘기만 들먹여요.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요?”

73세 트럼프는 ‘그녀는 밝고 멋진 미래를 기대하는 아주 행복한 소녀처럼 보인다.’고 응수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는 것이다. 재치는 있으나, 어진 마음은 아니다. 덕이나 정의보다는 달러와 핵미사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주제인 큰 나라의 오만한 마음 바탕이다.

‘기후변화’를 알면서부터 우울증과 야스퍼거 증후군에 시달리는 16세 툰베리를 조롱한 것이다. 이웃과 미래의 인류를 향한 선량한 마음씨로 소녀는 아프다. 빙산 녹아 북극곰 굶어죽고, 허리케인이 미국을 내리치는 것 등에 대한 저 걱정과 분노는 자못 성스럽다. 보이는가?

칼자루 쥔 ‘어른들’ 이익만 생각하는 같은 생각의 대세(大勢)와, 어른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훈육(訓育)되는 아이들 작은 목소리의 수세(守勢)는 이제 천둥으로 만난다. 툰베리에게 인류와 지구가 걸려있는 것이리라. 소이(小異)가 대동(大同)을 짊어진 것이니, 개벽(開闢)이다.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랴?’는 말로 장자는 세상을 가르쳤다. 수천 리 크기로 한 번 날아 9만 리를 오르는 큰 새 대붕(大鵬)을 상상한 호방함은 비길 데가 없다. 나비와 인생의 꿈이 뒤섞여버리는 호접지몽(胡蝶之夢)도 그의 꿈이다. 그의 대동소이는 자못 신묘(神妙)하다.

‘은혜 베푼다’는 뜻 혜시(惠施)라는 이름을 가진 지인(知人)의 생각을 전하는 형식으로 장자는 큰 것(大)과 작은 것(小), 같은 것(同)과 다른 것(異)의 구분을 지워버린다.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대일(大一), 지극히 작아서 속이 없는 것을 소일(小一)이라 한다. ... 하늘은 땅과 더불어 낮고, 산은 연못[澤池 택지]처럼 평평하다. 해는 장차 중천에 뜨지만 곧 기울고, 만물은 태어나지만 또한 죽는다.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大同而與小同異) 이것을 소동이(小同異)라 하고, 만물이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萬物畢同畢異)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 한다.

‘그게 그것’이란 뜻으로 써온 대동소이가 저런 뜻이었다네, 사전의 한 해설은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 만물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대성을 논한 것이고, 상대적 관점에서 보이는 차이는 차이가 아니다’라고 풀었다. 짐작한다, 허나 어렵다.

대다수 와중(渦中·소용돌이) 속 외로운 소수(小數)의 의미를 겸허하게 읽어내기, ‘대동소이의 덕’이다. 아동포르노로 ‘미래의 주인’ 아이들이 망가지는데, 범인 인생을 보호한다며 때리는 척 하다 마는 우리 사회의 부덕한, 비뚤어진 심보와 제도를 분노한다. 기껏 한 사례다.

툰베리의 小異는 大同을 부추겨 인류 살린다. 빛바랜 이데올로기 따위로 우린 뭘 하고 있지?

토/막/새/김

인간의 본디 덕(德)을 명상한다

다수결은 옳은 것이고, 다른 의견 소수는 다수 위해 입을 다물어야 옳은가? 인간을 위한 현대의 장치나 제도가 인간 본디를 제약하는 상황은 사상의 역사에서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

그 안에 매몰돼 헛되이 해석만 하다 말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뼈 속의 우리’는 어디 있지? 넓고 큰, 깊고 높은, 착함보다 향기로운 인간의 본디 덕(德)을 명상한다.

인내천(人乃天)의 홍익인간(弘益人間), 덕이 으뜸이었던 겨레의 삶이 다시 고개 든다. 좁쌀 한 알에 우주의 온 생명이 담긴 뜻으로 ‘가난의 풍요’를 넌지시 쥐어주고 떠난 무위당 장일순 선생(1928~1994)의 미소는 그 덕의 회복일 터다. 해 갈수록 추모(追慕) 커지는 까닭이다.

뱁새 속에서도 황새는 훤칠한 법이다. 겨레야, 아우 형들아, 쩨쩨하지 말자. 가슴 쫙 펴라, 내일 뜰 해를 더 기뻐하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너의, 우리의 개벽을 빚자.

강상헌 논설주간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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