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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한인 독립운동현장 생생

기사승인 2019.09.05  13: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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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안중근·최재형·이상설 등 ‘구국’ 뜻 펼친 연해주를 가다

‘2019 청소년 국외역사탐방-러시아 속의 한민족사’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큰 가르침을 받았다. 대한민국 독립과 통일의 의지가 살아 숨쉬는 연해주의 항일무장투쟁 전적지와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을 통해서다. 임시정부수립 및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곧은 가치관을 지닌 미래세대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서 시의적절했다.

지난 8월 15일부터 5일간 진행(1차는 7월25일~29일)된 이번 러시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크라스키노) 탐방은 중고생 31명이 참여했는데, 나라사랑의 큰 뜻을 몸소 실천한 독립운동가와 순국선열 및 구국영령들의 얼과 정신을 재조명 해보는 자리였다.

(사)대한해협해전전승기념사업회가 주최한 ‘2019 청소년 국외역사탐방-러시아 속의 한민족사’ 기행을 <시민사회신문>이 동행한다. 편집자

러시아의 정식명칭은 러시아연방(Russian Federation)이다. 북쪽으로는 북극해, 동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한다. 남쪽으로는 북한,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젠, 그루지아,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라트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에 닿아있다. 다향한 지질구조의 광활한 영토에 거의 모든 종류의 지원을 갖고 있지만 넓은 국토와 다양한 인종은 국가의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 혁명문화광장은 러시아의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1917~1922년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구소련을 위해 싸웠던 병사들을 위한 기념물이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시에 모이게 했던 장소 중 하나인 가슴 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그리고 크라스키노

◇연해주= 러시아어로 프리모리스키주다. 수도는 블라디보스톡이다. 면적은 165,900㎢, 인구는 300만 명 정도다. 이곳에는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인들이 최초로 살았다. 698년부터 926년까지 발해영토였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여진의 금나라가 지배했다.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금나라는 멸망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가 아무르강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러시아와 청나라가 체결한 내르첸스크조약은 스타노브이산맥을 양국의 국경선으로 정했다. 연해주는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청나라가 약해지면서 러시아는 남하를 시도했고, 결국 연해주를 차지했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블라디보스톡과 우스리스크시가 건설되었으며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랄산맥 부근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 해양공원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학생들.

주민들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밸라루스인, 고려인, 일본인, 중국인, 우데게이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폴란드인, 타타르족, 독일인, 유태인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해삼위 또는 해삼시로 알려졌으며 중국사람들은 ‘하이선와이’으로 부른다. 이것은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소련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다.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다. 1856년 러시아인에 의해 발견된 후 항구와 도시건설이 시작되었고, 1890년대 부터는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으며, 1903년 시베리아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시베리아횡단철도 9,288㎞의 종착지이자 시발점이다. 인구는 60여만 명이며 주로 러시아인과 우쿠라이나인들이다. 2012년 APEC 정상회담이 개최되기도 했다.

◇우스리스크= 연해주 남쪽에 위치한 도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 약 112㎞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우스리스크는 늪지대라는 뜻에서 기원했다. 우스리스크를 둘러싸고 흐르는 우수리강과 수이푼강의 영향인지 아침 안개를 자주 볼 수 있다.

인구는 약 18만 명 정도다. 시베리아철도와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의 분기점이다. 이곳은 과거 발해의 5경 15부중의 하나인 솔빈부였다. 연해주 독립운동 중심지로 약 1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으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다.

◇크라스키노= 러시아 하산스키 군에 있는 마을이다. 포시에트만에 접해 있다. 인구는 3만5천 명 정도다. 이곳은 발해시대 신라와 일본과의 해상과 육상교통의 중심지로 발해시대 염주성이 있었던 곳이다. 크라스키노 토성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포시에트만 안쪽의 습지에 축조된 유적으로 남북 380m, 동서 300m로 사각형 모양이다. 이 지역은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다.

▲ 신한촌 앞에선 청소년들. 큰 기둥은 한국, 두 번째는 북한, 작은 기둥은 고려인을 뜻한다. 1999년 8월15일 3·1 독립선언 80주년에 세워진 기념비에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선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과거를 모르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는 교훈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들이 건설한 마을 ‘신한촌’

신한촌은 1911년 한인들이 건설한 마을이었다. 이전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開拓里)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1년 3월 연해주 군무지사(軍務知事) 대리인 곤닷치(Gondatti)는 유행병(콜레라·장티푸스·페스트) 방지 등 위생상 이유로 개척리의 한인들을 이주토록 했다. 개척리의 폐쇄 결정으로 한인들은 새로운 시가(市街)인 북쪽 언덕으로 이주해 ‘신한촌(新韓村)’이라고 했다.

신한촌은 새로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권업회·권업신문사·한민학교 등이 세워지면서 독립운동 기반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당국과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1920년 4월 참변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후 1937년 스탈린의 대탄압으로 중앙아시아지역으로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하면서 신한촌은 폐허로 변해갔다. 현재 신한촌은 아파트 단지로 개발돼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1999년 8월 15일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한인들의 역사와 독립운동을 선양하기 위하여 신한촌 하바로프스카야 거리에 기념탑을 건립했다. 이에 앞서 1995년 이관규, 송희연 등은 신한촌 기념비 건립을 위해 관련 자료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부허가가 나지 않아 답보상태에 있었으나 러시아 국회의원 정유리에게 협조를 구해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999년 현재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신한촌 기념비는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협회장 리바체슬라브가 관리하고 있다.

▲ 노비출신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은 한인마을마다 32곳의 소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안중근 의거의 지원자로 대동공보사 기자증을 만들어 줬으며, 거사 후 변호사 선임과 유족을 보살피기도 했다.

독립운동 큰 손 최재형 거주지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보르다르스코로 거리 38번지는 러시아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최재형이 말년에 거주했던 장소다.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은 함북 경원(慶源) 출신이다. 그는 1869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지역의 지신허(地新墟)로 이주했다. 그는 통역을 비롯해 러시아군에 우육(牛肉)을 조달하는 축산유통업과 도로·건물을 건설하는 건축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재산의 상당 부분은 의병과 안중근(安重根)의 하얼빈 의거에 여비를 보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다.

그는 또 러시아에서 정치·사회·경제 방면에서 활동,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97년 7월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에 이어 러시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연추(煙秋)지역이 러시아 행정지역에 편입되어 도소(都所)가 설치되자 이를 책임지는 도헌(都憲)으로 선출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1908년 5월 조직된 동의회(同義會)의 총장,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 사장, 1913~1914년 한인 자치기관인 권업회(勸業會) 회장, 1914년 러시아 한인이주50주년기념회 회장을 지냈다. 그의 영향력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18년 6월 열린 제2회 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도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토지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최재형의 활동은 1918년 8월 일본군이 연해주로 출병하면서 위축되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우수리스크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한인부대에 무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지만 1920년 4월 참변 당시 그는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와 함께 한인지도자였던 김이직(金理直)·엄주필(嚴柱弼)·황경섭(黃景燮)도 피체되었는데 모두 일본군에 피살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유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아 최재형이 어디에서 순국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청소년들은 과제를 통해 탐방 유적지의 선행 및 복습의 기회를 만들며 단합심을 길렀다. 일정 이후에도 피곤함을 잊은 채 과제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탐방단의 모습에서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러시아 한인 최고자치기관 ‘전로 한족 중앙총회’

연해주 우수리스크 자나드보롭쓰까야 15번지는 러시아 혁명 이후 한인들의 진로 결정을 위해 개최했던 전로한족회대표자 회의 장소다. 1914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시베리아 극동 지방이 제2의 전선이 되는 것을 우려한 제정러시아는 일본과 타협,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그러나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1917년 2월 혁명과 그 뒤를 이은 10월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한인들은 민족적 각성과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침체됐던 항일 독립운동을 다시 전개했다.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11일 동안 한인대표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우스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다. 1917년 12월에는 제2차 대표자회의를 우스리스크에서 열어 위원장 문창범, 부위원장 김립을 중심으로 전로 한족 중앙총회(고려국민회)를 조직하였다. 우스리스크에 본부를 둔 전로 한족 중앙총회는 연해주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했으며 기관지로 <청구신보>를 간행했다. 이후 볼세비키 혁명에 전폭 가담하는 문제로 내부적 진통이 있었으나 당시 전로 한족 중앙총회는 러시아 한인의 최고자치기관이자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이후 전로 한족 총회는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며 노령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 이상설은 1917년 서거한 독립운동의 지도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한국독립을 주창했으며,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수이푼 강변에 뿌렸으며 2001년 비를 세웠다.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 다가 갈수 없는 현실에 2차 탐방단은 먹먹함을 안고 먼발치에서 헌화와 추도사를 낭독할 수 밖에 없었다.

구국운동 선봉 이상설유허지

연해주 우수리스크 우쪼스노예 마을 주변 라즈돌리노예강 옆에는 러시아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이상설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있다. 익히 알려지다시피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충북 진천 출신이다. 1894년 문과에 급제, 관직생활을 했지만 ‘을사늑약’ 이후 구국활동이 제약을 받자 중국 용정(龍井)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1906년 8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용정에서 활동하던 그는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가했다.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도 함께 특사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1907년 6월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 한국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에 나섰다.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주권회복의 당위성을 열강에게 호소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먄서 그는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의 최적지로 판단하고 유학자인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중·러 접경지대에 있는 봉밀산(峰密山)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병탄을 무효로 선언하고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성명회(聲明會)에 참여했다. 이 일로 그는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니콜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추방되었으며, 이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권업회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간섭과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중국 상해로 활동지를 옮겨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결성에 참여했다.

1916년 초 건강이 악화돼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에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기후가 비교적 따뜻한 우수리스크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결국 1917년 4월 1일 47세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임종 전에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자신의 몸과 유품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했다. 2001년 10월 18일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이상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라즈돌나야강에 유허비를 세웠다.

▲ 안중근 단지 동맹비에서 청소년들이 그 뜻을 새기고 있다. 단지동맹은 1909년 3월 안 의사를 포함한 12명의 열사가 동맹을 결성하고, 외손 무명지를 잘라 태극기에 혈서를 쓰며 독립을 결의한 것을 말한다. 특별히 이번 2019 청소년 국외역사탐방길에는 우리 해군사관생도 2명이 함께 인솔교사로 참여해 러시아속의 한민족사를 더욱 빛나게 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와 단지혈서 엽서

연해주 하산군 크라스키노 유니베라농장 입구에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우뚝 서 있다. 1908년 7월 안중근은 동의회(同義會)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 연해주 귀환 이후 그는 약 3개월 동안 두 명의 동지와 함께 각지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국내진공작전이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나자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유세에 나선 것이었다.

한인사회를 순방한 이후 안중근은 연추로 돌아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연추 하리(하연추 추정)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 모였다. 함께한 동지들은 안중근을 비롯해 김기룡(金起龍) 강순기(姜順琦) 정원주(鄭元柱) 박봉석(朴鳳錫) 유치홍(劉致弘) 김백춘(金伯春) 백규삼(白奎三) 황병길(黃丙吉) 조순응(趙應順) 김천화(金千華;갈화천) 강창두(姜昌斗) 등 총 12명이었다. 이곳에서 이들은 왼손 무명지를 끊고 ‘사역동혈(死亦同穴) 생역동일(生亦同日)’을 맹약하여 태극기 전면에 ‘大韓獨立’ 네 자를 혈서로 남겼다. 이것이 1909년 2월 26일 단지동맹(斷指同盟)으로 알려진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결성이었다.

동의단지회 결성은 의병결사인 동의회의 취지와 정신을 계승, 후일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자 조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지를 기념해 2001년 10월 19일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단지동맹비를 세웠다. 최초로 비를 세운 곳은 추카노보 마을 입구 시냇가 공터였다. 그러나 관리가 어려워지자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크라스키노에 진출해 있던 유니베라(구 남양알로에)와 협의해 2007년 11월 농장 입구로 이전하여 세웠다. 하지만 이곳이 러시아 국경수비대 관할 통제구역에 포함되면서 한국인들의 관람 및 참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유니베라 지사 입구 쪽에 2011년 8월 다시 이전하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현재 단지동맹비는 관리가 잘 이뤄지고 있으며, 관람에도 무리가 없는 상태다. 다만 안내문이 빛에 반사되어 글을 읽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지신허 옛터에 세운 한인이주 기념비가 군사지역으로 방문이 제한되어 있어 이곳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장고봉전투비. 러일전쟁의 기념비이지만 동해가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위해 배를 탄 곳, 우리 민족이 최초로 연해주로 들어오게 된 항구, 최재형선생이 어린시절 러시아 선장에게 발견된 포시에트 항을 볼 수 있으며, 북,중,러 국경이 30분 남짓인 이 곳에서 북한으로 향하는 기찻길과 중국으로 향하는 도로를 보며 통일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치열한 격전지 ‘장고봉전투기념비’

장고봉 근처 하산 호수 부근에 소련군이 세운 장고봉 전투 기념비가 있다. 소련군은 하산 호수 근처에서 발생한 전투라 하여 장고봉 전투를 하산호 전투라고 부른다. 하산 호 전투 또는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은 1938년 7월 29일부터 8월 11일까지 한국, 중국, 러시아 삼국의 국경인 두만강의 하산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으로 일어난 전투다. 소련이 승리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발단이 된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7월 29일에 일본군의 공격을 막는 데에 성공했으나 7월 31일에는 일본군의 공격에 후퇴했다. 그러나 이후 소련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반격했다. 8월 2일부터 8월 9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결국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10월에 일본은 미국 정부에 평화 협상 중재를 요청했다. 11월에 소련과 일본 쌍방은 서로에 대한 군사적 적대 행위를 중지했고, 이후 1939년 5월-9월의 할힌골 전투 때까지 양국의 전투는 없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일본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이 승리했지만 피해도 커 이 지휘의 총책임자였던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는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처형되었다.

이번 역사탐방 전반에 대해 교육과 현장 이해를 도운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장(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우리 청소년들이 러시아지역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곳곳을 살피며 선열의 독립정신과 애국애족 정신을 배우며 역사와 통일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학습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며 "폭넓은 경험을 통해 세계속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색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관 형성과 평화통일 의지를 실현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 매일 저녁 일과 후 조별로 모여 인솔교사의 안전 지도하에 주도적으로 만든 과제를 발표하는 시간을 통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계기와 서로에게 느낀 점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휴대폰 하나만으로 만들어 낸 단원들의 대견함에 모든 인솔자는 뿌듯함을, 모든 탐방단은 역사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었다.

소중한 체험, 그러나 풀어야 할 과제도

임시정부 및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크라시키노)의 독립운동관련사적지를 탐방한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노력과 고난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의 기회를 가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단순한 사적지 방문이 아닌 조별과제발표, 퀴즈 등을 통한 여가활동도 참여의식을 높였다. 또한 해군사관생도가 참가하는 추도의식을 통한 순국선열들의 얼과 정신을 재조명하는 뜻 깊은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책으로 보는 교육보다 미래세대에게는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생생한 현장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탐방을 통해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탐방기간이 방학기관과 겹치는 문제, 긴 이동거리, 특히 이상설유허비 경우 비가 오면 강이 범람해 들어갈 수 없어 모두들 애통해 하며 발길을 돌려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나서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귀담아야 들어야 하겠다.

정경원 (사)대한해협해전전승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청소년들과 국외역사 탐방 후 만족도에 대한 질문에 96.8%인 60명이 ‘만족’이상, 탐방 목적 달성에 대한 질문에는 응답자 전원이 ‘달성이상’으로 응답했다”며 “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찾아가는 역사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여 역사의식 및 보훈정신 계승교육 활성화 계기를 마련한다는 목적에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했다.

설동본 기자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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