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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시대’ 에 구겨진 고운 우리말 ‘영부인’

기사승인 2018.10.24  10: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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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정치적으로 심하게 구긴 말 ‘대통령 부인’의 호칭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의 말과 행실을 언론은 때로 신선하게 대하는 것 같다. 남편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그에게서 큰 나라 제일부인(第一夫人),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나름의 품격을 읽는 모양새다. 보도 내용을 보자.

▲ 트럼프 부부-허리케인 피해지역을 둘러보는 트럼프 美대통령 부부. 기자는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가 함께...”라고 했다. 우리는 대통령 부인을 ‘영부인’이라고 한다. (CNN 뉴스 화면 갈무리)

남편의 ‘과거’ 때문에 마음이 상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항상 유쾌한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 건지,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에 대해 안다”면서 “나는 강하며 일의 우선순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센스가 느껴진다. 미국 대통령 부인의 호칭은 이렇게 ‘퍼스트레이디’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부인’을 이르는, 가장 흔한 말은 영부인이다. 멜라니아 관련 외신 보도를 번역한 그 기사도 멜라니아를 영부인이라고 적었다. 대통령과 부인을 합친 말이겠다. 비슷한 뜻으로 대통령의 딸은 영애, 아들은 영식이라고 한다. 대통령을 각하(閣下)라고 부른 그 시절, 이 이름에는 금테가 둘려 있었다.

‘영부인’ 단어를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란 원래의 뜻으로 썼다가 큰 코 다친 사람들의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예전 정권들, 독재의 무참한 시대에 즐비했다고 한다.

휘자(諱字) 또는 諱라는 말이 있다. 과거 임금과 같은 높은 사람의 살았을 적 이름이다. ‘휘’는 숨기다, 두려워하다, 꺼리다 따위의 뜻이니,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이름이었다. ‘흐지부지’라는 말이 여기서 왔다. 어떤 사람이나 일이 두려워 콕 집어 말하지 않고 우물쭈물 얼버무려 넘긴다는 뜻의 익은말 휘지비지(諱之祕之)의 발음이 그리 변한 것이다.

영부인 영애 영식이 ‘두려운 이름’이 되면서 정작 원래의 영부인 영식(令息) 영애(令愛)의 본뜻이 흐지부지됐다. 말은 생명체와 같은 것, 그 말을 함께 쓰는 사람들 즉 언중(言衆)들의 생각과 생활의 생동감 넘치는 반영이다. 대부분 언중들이 원래의 뜻을 잘 모르게 된 까닭이다.

대통령(大統領)의 부인 영부인(領夫人)이 아닌, 원래의 영부인(令夫人)은 아름다운 또는 현숙한 부인이란 뜻의 존칭이다.

令에는 ‘명령하다’는 뜻 말고 ‘착하다’ ‘좋다’는 뜻도 있다. 영정(令正) 영규(令閨) 영실(令室) 등의 令자 든 다른 존칭도 있다. 영(領)부인의 우세 속에 원래의 영(令)부인을 비롯한 전통의 존칭들은 낡은 언어가 되어 스러지는가. 어부인(御夫人) 귀부인이라고도 한다. 요즘의 아주머님이나 사모님과 비슷한 존칭이다.

격식 갖춘 대통령 부인의 존칭은 대통령영부인(大統領令夫人)이라야 맞다. ‘令’자가 빠진 대통령부인이나 영(領)부인은 실은 존경의 뜻이 삭제된 어정쩡한, 메마른 이름인 것이다.

남의 딸을 높여 부르는 ‘영애(令愛)’라는 일반명사도 대통령 딸 즉 ‘영애(領愛)’로 그 뜻이 옮아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휘’의 대상이었다.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자 언론은 ‘대통령의 영애시절’이라는 제목을 생산하기도 했다. ‘남의 아들’ 영식(令息) 단어도 같은 처지였다.

‘영부인’은 이렇듯 역사적, 정치적으로 심하게 구겨졌던 말이다. 이 말의 오염이 원래 우리말의 고운 광채를 가리고 있다. 오물(汚物)은, 치우는 게 옳으리.

▲ 령(令)의 옛글자. 모자를 쓰고 다소곳이 앉아 신(神)의 말을 듣는 사람의 모습에서 ‘시키다’와 함께 ‘좋다’는 뜻이 나왔다. (하영삼 著 ‘한자어원사전’ 삽화)

토막새김/ 울고 싶도록 서글픈 한국어학의 현실

‘흐지부지 말아야 또 다른 주제, 장단음 문제다. 영부인은 ‘영’을 길게 발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떤 국어사전은 장음(長音) 표시[:]가 없다. 단음(短音)으로 읽으라는 것이다. 한자어 장단음의 기준인 사성(四聲)으로 영(令)은 거성(去聲)이니 [영:부인]이 맞다. 영(領) 또한 상성(上聲)이니 領夫人도 [영:부인]이다.

이 사성은 현대 중국어의 1~4성 사성과는 다른, 전통 한자의 평(平) 상(上) 거(去) 입(入)의 구분이다. 음의 높낮이와 길이를 가리킨다. 우리말 한자어에서 평성 입성은 짧게, 상성 거성은 길게 발음하는 것이 기준이다. 높낮이가 없는 우리말에선 길고 짧음으로만 사성을 적용한다.

장단음 혼동은 현대 한국어의 큰 취약점일 터다. 사전마다, 전문가마다 다르다. 어떤 학자는, 설문조사를 해보니 어느 말은 장음이더라, 내 기억에 저 말은 단음이었다 하는 논문을 쓰기도 해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정도다. 재야국어학자 고(故) 최한룡 선생의 역작 ‘울고 싶도록 서글픈 한국어학의 현실’(도서출판 신정사 刊)은 이를 매섭게 가르친다.

불 지르는 방화(放火 방:화)범죄에 대응해 불을 막는 방화(防火 방화)활동을 강화하자. 군사들의 사기(士氣 사:기)를 높여 요사스런 기운 사기(邪氣 사기)가 군영에 스며드는 것을 막자... 이런 사례들 많다. 소리글자 한글로 빚는 한국어의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구분하는 명료한 방법은 그 뿌리인 한자의 사성에 있다.

구분이 어려운 말과 글은 흐리멍텅이고 흐지부지다. 우리말글은 그래서는 아니 된다.​

강상헌 논설주간/우리글진흥원장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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